삼국지 바로보기 10

<010> 진궁(陳宮)은 조조를 붙잡았나?

진궁은 후한말의 동군(東郡) 사람이며, 자는 공태(公台)이다. 처음에는 조조를 따랐지만 그가 악하고 어질지 못한 것을 보고 떠났다. 나중에 여포를 따르며 종종 계략을 세웠지만, 그의 계략은 여포에게 채용되지 않았다. 결국 전투에서 패하여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진궁은 조조와 서로 알기 전에 중모현(中牟縣) 현령에 부임하였고, 도망치는 조조를 붙잡았지만 곧바로 몰래 석방하였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삼국지연의 제4회에 이 이야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조는 동탁 살해에 실패하고 낙양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중모 현령인 진궁을 만난다. “왜 동탁을 배신하였는가?” 진궁이 추궁하자, 조조는 대답했다. “국가의 큰 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위조(僞詔)를 ..

<009> 조조(曹操)는 동탁을 찔러 죽이려고 했을까?

조조(曹操)는 자를 맹덕(孟德), 아명을 아만(阿瞞)이라 하고,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삼국시대의 뛰어난 정치가, 군략가, 문학가로서 후한말에 효렴(孝廉)에 선발되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관동의 제후들과 함께 동탁 토벌에 가담했다. 그러나 나중에 천자를 수중에 두고 제후들을 호령하고, 복황후(伏皇后)를 죽여 조정을 독점한 것 때문에 1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사람들의 욕을 먹으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도 희대의 간신으로 그러져 있다. 삼국지연의 제4회에는 동탁이 조정을 독점하여 소제(少帝)를 폐한 뒤, 마음대로 폭력을 휘둘러서 백성을 괴롭히며 정치를 문란케 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당시의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신하들은 나라가 기우는..

<008>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에 입성했을 때 신분은?

동탁(董卓)은 후한의 농서(隴西) 임치(臨淄) 사람으로, 자는 중영(仲潁)이다. 황건적을 진압할 때에 중랑장(中郞將)·전장군(前將軍)·병주목(幷州牧) 등을 역임했다. 소령(昭寧) 원년(189년)에 병사를 이끌고 도읍인 낙양에 입성, 소제(少帝)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세워 조정을 독점했다. 역사상의 동탁은 아무리 미워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다. 낙양에 올라와 몇 가지 민심을 사로잡는 일도 했지만, 단지 관대하게 보이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와 그가 데려온 양주(凉州)의 병사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상국(相國)으로 실권으로 잡은 동탁은 부하들의 약탈을 묵인하며, 낙양의 고관이나 부호의 재산을 거의 전부 빼앗았다. 더구나 사람들을 태워 죽이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

<007> 독우(督郵)를 채찍질한 것은 장비일까?

독우(督郵)의 벼슬은 한대에 군수(郡守) 밑에 있으면서 현의 관리를 점검하는 직위였다. 품계는 높지 않았지만 직권은 컸다. 후한말에 관리의 부패는 묵과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뇌물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독우도 항상 직권을 내세워 현장(縣長)이나 현위(縣尉)에게 뇌물을 요구하였다. 삼국지연의의 제2회에는 유비가 안희현(安喜縣)의 현위(縣尉)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독우가 시찰을 와서 권력을 내세워 뇌물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뇌물을 주지 않자, 독우는 유비가 백성을 해치고 있다는 죄를 덮어씌웠다. 유비는 몇 번이고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가 해명을 하였다. 그러나 독우의 태도는 방자함 그 자체였다. “당신, 황족을 사칭하여 있지도 않은 공적을 내세울 생각인가?” 이..

<006> 관우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사용했을까

삼국지연의 제1회에서는 유비·관우·장비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생사를 함께하며 서로 협력하여 위기에 대처하고, 위로는 나라에 충성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재난에서 구할 것을 맹세한다. 그 후 우선 준마를 사고, 유비는 도공에게 명해 쌍고검(雙股剑)을 만들고, 관우는 무게 82근의 청룡언월도, 별칭 냉염거(冷艶鋸)를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20여년에 걸쳐 계속되는 정벌의 과정에서 독자는 청룡언월도에 대해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용맹한 관우는 평생 전장을 누볐다. 이 청룡언월도에 의해 안량(顔良)·문추(文醜)는 목숨을 잃었고, 다섯 관문을 지나는 장면에서는 조조(曹操)의 부하 장수 여섯 명을 베었다. 이밖에도 청룡언월도에 희생된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수·당 이후 관우가 우상화됨에 따라 청룡언월도는 비범..

<005> 장비의 얼굴 생김새는 어땠을까

삼국지연의 1회에서는 장비를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키가 8척에 표범 같은 머리, 번쩍이는 눈, 근육질의 아래턱, 호랑이 같은 수염에다, 목소리는 우레와 같고 힘은 거친 말과 같다」 거친 남자에 추남의 전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도(成道) 무후사(武候祠)에 있는 장비의 인물 조각상의 생김새도 겁나는 얼굴이다. 옛날부터 무후사의 인물 조각상은 대부분 소설에서, 즉 거의 삼국지연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장비의 얼굴이 검은 것은 주로 야담가와 연극의 인물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연극에 등장하는 과장된 인물 분장은 사회적 의의가 있어서,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 평가와 미의식이 담겨 있다. 장비를 표현하는 검은 분장은 바로 검은 얼굴로써 강직함을 표현하고 있는..

<004> 유비·관우·장비의 고향은 어디일까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탁현(涿縣)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에 속해 있다. 이 현의 서북쪽에 옛날에는 탁수(涿水)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북성현명고원(河北省縣名考源)』에 「탁군(涿郡)·탁주(涿州)·탁현(涿縣)의 이름은 모두 탁수(涿水)에서 유래했다」고 쓰여 있다. 한나라 때 탁현의 행정 관청은 지금의 하북성 탁현에 있었다. 탁현의 대수루상촌(大樹樓桑村)이 유비의 고향이라고 하며, 이 마을은 탁현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삼국지연의에서도, 민간 전설도 정사의 에 기록된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큰 뽕나무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것도 사서(史書)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유비의 사당인 한소열묘(漢昭烈廟)는 대수루상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탁현의 누상묘..

<003> 유비·관우·장비의 성씨(姓氏)는 확실할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1회에는 유비의 이름은 비(備), 자(字)는 현덕(玄德)이라고 하지만, 왜 이름은 비이고 자는 현덕인 것인지 나관중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 유비의 이름과 자는 그것이 의미하는 색깔에서 의미를 가져왔다는 의견이 있다. 청의 계복(桂馥)은 자신이 저술한 『찰박(札朴)』에서 「비(備)는 오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하여, 「오색은 검은색에 이르러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현덕(玄德:갖추어진 덕이라는 해석)이라 자를 붙인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고공기(考工記)』, 『시경(詩經)』 등에서 전하는 자료를 인용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계복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도 있다. 유비의 이름과 자는 도가(道家)의 학설에서 취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인데..

<002> 도원결의(桃園結義)에서 유비가 맏형이 맞을까

중국 문학사에서 만약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같은 소설을 결의소설(結義小說)이라고 일컫는다면, 이러한 소설의 흐름은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당의 전기(傳奇) 소설 가운데 의 이야기, 『설악전(說岳傳)의 이야기』 중 , , 의 이야기, 『삼협오의(三俠五義)』 중 의 이야기들은 모두 찬란히 빛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이 결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유비·관우·장비의 결의다. 사람들은 도원결의를 의형제의 정을 표현하는 대명사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삼국지연의의 제1회, 도원결의의 이야기에는 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이 복숭아꽃이 만발한 정원의 숲속에서 소와 양을 바쳐 제사를 지내고 하늘에 맹세하여 의형제를 맺는다. 이 때 나..

<001>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사실일까

유비·관우·장비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 세 사람이 공적으로는 군주와 신하, 사적으로는 형제의 관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송(宋)·원(元) 이후로 민간 문학 분야에서 세 사람의 관계 및 이들의 천하태평 과정이 문학화 되기 시작했다. 즉, 『삼국지평화(三國志平和)』,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 『관서고사(關西故事)』 등 작품 속에서 미화와 과장이 첨가되었고, 이로 인하여 서서히 도원결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작자 나관중은 원대에서 명대에 걸친 동란의 시대를 산 사람이다. 당시 농민 봉기의 대부분은 결의의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나관중 자신도 왕이 되려는 뜻을 품었었고, 농민 봉기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반원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