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董卓)은 후한의 농서(隴西) 임치(臨淄) 사람으로, 자는 중영(仲潁)이다. 황건적을 진압할 때에 중랑장(中郞將)·전장군(前將軍)·병주목(幷州牧) 등을 역임했다. 소령(昭寧) 원년(189년)에 병사를 이끌고 도읍인 낙양에 입성, 소제(少帝)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세워 조정을 독점했다.
역사상의 동탁은 아무리 미워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다. 낙양에 올라와 몇 가지 민심을 사로잡는 일도 했지만, 단지 관대하게 보이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와 그가 데려온 양주(凉州)의 병사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상국(相國)으로 실권으로 잡은 동탁은 부하들의 약탈을 묵인하며, 낙양의 고관이나 부호의 재산을 거의 전부 빼앗았다. 더구나 사람들을 태워 죽이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명백한 죄악은 사서(史書)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심하다.
190년 조조(曹操)·원소(袁紹) 등이 관동(關東)의 제후들을 이끌고 역적인 동탁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자 동탁은 한의 헌제(獻帝)를 데리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서쪽으로 이동할 때에도 그는 하고 싶은 대로 방화·살인·약탈을 저질렀다. 그로 인해 낙양과 부근 200리 이내의 관묘·관청·민가는 모두 엉망이 되었다.
또한 동탁은 여포(呂布)에게 후한의 역대 황제의 능과 삼공구경(三公九卿)의 묘를 도굴하게 하여 재물을 훔쳤다. 국가의 귀중한 도서, 서적까지도 모두 약탈했다. 장안으로 천도한 후에는 태사(太師)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에게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동탁은 초평(初平) 원년(192년)에 동탁은 왕윤(王允)·여포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지연의에 그려진 동탁의 이야기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과장된 부분이나 픽션이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동탁에 대한 증오심의 반영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몇 군데는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가 눈에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동탁이 낙양에 입성했을 때의 신분이다.
삼국지연의의 제3회에는 동탁이 양주 병사를 이끌고 낙양에 입성했을 때의 신분이 전장군(前將軍)·오향후(鰲鄕候)·서량자사(西涼刺史)로 되어 있다. 나관중의 이 소개에 대해 수백 년 동안 그 진위가 검토된 적이 없었다. 동탁의 낙양 입성 때의 신분에 대한 나관중의 소개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인물의 신분을 기술할 때, 중국에서는 관직을 앞에 두고 직위를 뒤로 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는 관직→작위→관직과 같이 순서가 분명히 거꾸로 되어 있다. 즉 상식적으로는 전장군(前將軍)·서량자사(西涼刺史)·오향후(鰲鄕候)와 같은 순서가 되어야 한다.
『후한서(後漢書)』 <동탁전(董卓傳)>을 보면 중평(中平) 5년(188년)에 동탁은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었고, 좌장군(左將軍) 황보숭(皇甫嵩)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진창(陳倉)에 주둔한 왕국(王國)·한수(韓遂)의 부대를 격파했다. 중평(中平) 6년 초에 조정은 동탁을 소부(少府)에 임명하여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동탁은 부하인 황중(煌中)의 의병과 진(秦)의 호병(胡兵)이 자신을 만류해 어쩔 수 없다는 구실을 대며 낙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달리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 후 영제(靈帝)의 병이 깊어졌다. 조정에서는 칙명을 내려 동탁을 병주목(幷州牧)에 임명하고, 군사를 황보숭에게 맡기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도 「군에 복무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지금가지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부하를 대하여 왔으므로, 서로 허물없이 친하며, 상하 일치단결하여 봉사에 힘쓰고 있습니다」라는 핑계를 대고 병주에 부임하지 않았다.
동탁이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명령에 불응한 것은 후한 왕조가 이미 상당히 혼란한 상태였고, 봉괴 직적으로 영제 사후 대란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야심에 찬 그는 병사를 하동(河東)에 주둔시키고 정세를 지켜보았다. 따라서 낙양에 입성하기까지 동탁이 전장군(前將軍)의 직위를 보류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이 점은 나관중도 틀리지 않았다.
그럼 두 번째 직위인 서량자사(西涼刺史)는 무엇인가? 후한은 건국을 13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그 중 양주(凉州)는 아주 외진 중원의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서주(西州)라고도 불렸다. 한편 서량이라는 것은 송대에 설치된 부명이므로 후한 때에는 원래 서량자사(西涼刺史)라는 직위는 없었다. 있다면 오직 양주자사(凉州刺史)가 있을 뿐이었다. 삼국지연의가 송대의 직위로 후한 인물을 부르고 있는 것은 명백하게 틀린 것이다.
우선 『후한서』나 『삼국지』를 살펴보아도 동탁이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임명된 적은 없다. 그는 한의 영제가 중병이 들었을 때 병주목에 임명되었을 뿐이고, 부임이야 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그 직위에 올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한서』 영제기(靈帝紀)에 「병주목인 동탁이 집금오(執金吾)인 정원(丁原)을 죽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동탁이 낙양에 입성했을 때의 직위가 서량자사(西涼刺史)라는 것은 나관중의 착각이며, 병주자사로 해야만 한다.
세 번째 직위인 오향후(鰲鄕候)에 대해 살펴보자. 『후한서』 <동탁전>을 보면 중평(中平) 2년(185년)에 동탁을 태향후(斄鄕候)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탁이 제후가 되어 태향을 영지로 얻었다는 것이다. 태(斄)가 많이 쓰이는 글자가 아니므로, 삼국지연의를 필사한 사람이나 판각한 사람이 틀리게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향후(鰲鄕候)는 이상한 직위일 뿐 아니라 의미도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동탁이 낙양에 입성했을 때의 신분은 도대체 무엇인가? 직관지(職官志)와 정사를 살펴보면, 동탁이 태향후에 봉해진 시기는 중평(中平) 원년(184년)이지, 중평 2년이 아니다. 다른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위의 두 가지 검증은 타당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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