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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조조(曹操)는 동탁을 찔러 죽이려고 했을까?

행운가득하루 2023. 2. 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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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는 자를 맹덕(孟德), 아명을 아만(阿瞞)이라 하고,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삼국시대의 뛰어난 정치가, 군략가, 문학가로서 후한말에 효렴(孝廉)에 선발되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관동의 제후들과 함께 동탁 토벌에 가담했다. 그러나 나중에 천자를 수중에 두고 제후들을 호령하고, 복황후(伏皇后)를 죽여 조정을 독점한 것 때문에 1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사람들의 욕을 먹으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도 희대의 간신으로 그러져 있다.

 

삼국지연의 제4회에는 동탁이 조정을 독점하여 소제(少帝)를 폐한 뒤, 마음대로 폭력을 휘둘러서 백성을 괴롭히며 정치를 문란케 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당시의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신하들은 나라가 기우는 것을 근심하여 슬퍼하였다. 특히 효기교위(驍騎校尉) 근위 무관인 조조는 한이 골수에 맺혀 있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동탁을 죽여 천하에 사죄하고 싶다고 하여, 왕윤에게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간다.

 

조조는 마침 동탁의 부름을 받아 승상부(丞相府)로 갔다. 동탁은 조조가 자기의 부름에 늦게 오는 것을 탓했다.

 

마른 말이어서 늦었습니다라고 조조가 변명하자, 동탁은 여포에게 서량의 준마를 가져오게 하였다. 여포가 없어지자 그 큼에 조조는 동탁을 죽이려고 하지만, 상대는 힘이 장사인 동탁이므로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동탁은 뚱뚱하여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하여 누웠다. 조조는 서둘러 칼을 빼려고 했지만, 동탁은 거울에 비친 조조의 움직임을 보고 방향을 바꾸었다. 동탁은 무엇을 할 작정이냐며 조조를 경계했다. 마침 그 때 여포가 서량의 준마를 끌고 왔다. 조조는 임기응변의 재치를 발휘하여 칼을 다른 손으로 바꿔 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보도 한 자루를 승상께 바치고 싶습니다

 

동탁은 보도를 여포에게 건네고, 조조를 데리고 정원으로 내려와 말을 보여 주었다. 동탁 살해에 실패한 조조는 추궁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 길로 낙양을 탈출하여 곧장 남동쪽으로 말을 달려 초현으로 도망쳤다.

 

조조가 칼을 바치고 동탁을 찌르려는 대목은 문학적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솜씨이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민간에 전해 내려왔다. 또한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그럼 역사상 이 일은 확실한 것일까?

 

 

정사의 위서(魏書)<무제기(武帝記)>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탁은 중평(中平) 6(189)에 영제(靈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세운다. 또 조조를 효기교위에 임명하여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이 결국에는 실패하리라 보았다. 그래서 명령에 불응하고 고향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 일은 정사의 <원소전(袁紹傳)>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동탁이 실권을 잡았을 때, 조조가 확실히 효기교위에 임명되었다는 것과 조조와 동탁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었던 면이 있어서, 조조는 내심 동탁이 언젠가는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조는 나중에 동탁을 토벌하는 싸움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효기교위의 자리에 취임한 적은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조가 동탁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에 그쳐서 도망쳤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칼을 바치고 동탁을 찌르려고 했다는 장면은 완전히 가공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조조가 동탁의 살해를 괴했던 것은 사서에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관중이 이 이야기를 꾸며낸 목적은 조조를 깎아내리는 것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실제로는 반동탁 싸움에 있어서 조조의 지도적 역할을 반영하고 있으니,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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